내 심장을 쏴라 / 은행나무 (2009년 4월)
46. 이 바닥 밥을 먹어본 자는 안다. 정신병원은 치료 기관이 아니라 교육 기관이라는 걸, 슨응을 익히는 학습장이라는 걸, 반항은 더 지독한 궁지와 같은 말이라는 걸....
52. 패인은 ..... 자명하다.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외톨이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라는,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54. 놈이 두려웠다. 내가 두려웠다. 놈의 사악한 속삭임을 진실이라 믿어버릴까 봐, 놈이 시키는 대로 저질러버릴까 봐, ~~ 의식이 제 아무리 저항해도 무의식은 세뇌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59. 공포 때문이었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는 순간에 대한 공포.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마저 싫었다.
84. 퇴원 후 아버지와 맞담배질을 한 적이 있었다. 곧바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서 깊은 법, 가장의 주먹이 무너진 가풍을 바로잡았다.
85. 병원측이 흡연실을 만들고 담배와 커피를 제공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폭력과 격리, 약제가 통제수단이라면 두 기호품은 젖병이다. 물리면 바로 조용해진다. 물론 젖병 값은 보호자가 댄다.
94. 우라지게 무서운 놈의 물건과 비위는 건드리지 않는 게 철칙이다. 방울뱀 소굴에 손을 넣고 휘젓는 짓은 미친놈도 안 한다.
95. 지금이 백수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밥 굶는 시대는 아니잖아? 이 산골짜기까지 일하러 올 처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말이지.
141. 그 충격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소동을 벌인 이들 역시 처음엔 그랬을 것이다. 정신병원에 처음으로 끌려온 자라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충격이 온 건 그들이 나의 현재이자 미래라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165. ‘안 돼’와 ‘안 해’ 사이의 괴리가 한 인간의 성미를 어떤 식으로 건드리는가에......
184. 정신병동에는 이가 온전한 사람이 드물다. 까맣게 썩어 들어가거나 몇 개 남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 성분이 이를 부식시켜 그런다고도 하고, 위생 관념의 문제라고도 한다. ~~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 다른 버전이었다. 자해 말이다.
196. 사람들과 동작이 일치하는 시점이 두 번 왔다. ‘고장 나 멈춘 시계동 하루 두 번은 맞는다’는 불멸의 진리를 새삼스레 확인한 아침이었다.
210. 거치대를 치켜들고 점박이에게 다가섰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213.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252. 최기훈이 동의했다는 것이 뜻밖이긴 했지만 이해 봇할 일은 아니었다. 머리를 삶으면 귀는 자동으로 삶아지는 법 아니겠는가.
255. 곤봉은 정수리, 뒤통수, 옆통수, 고루고루 차별 없이 두들겼다. “빨리빨리 내려가란 말이야.” 낙타한테 나이키 운동화를 신긴다고 치타처럼 뛸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얻어맞아도 우리는 빨리 내려갈 수가 없었다.
284.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날개 꺾인 독수리의 절망은 오리의 이해 영역 밖이었다.
289.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의 얼굴 위에서 생각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위 눈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시선을 놓치면 그의 마음까지 놓쳐버릴 것 같았다.
290. 나로선 그런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겐 도망쳐서 도달해야 할 만큼 절실한 세상이 없었다.
291.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
291.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한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쁜이다.
292.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누가 그랬던가. 물에 빠진 자의 눈에는 일생이 지나간다고. 우울한 세탁부는 나를 물에 빠뜨렸다. 스물다섯 해가 눈앞을 지나갔다.
292. 망설임이었다. 생각이 분 단위로 바뀌었다.
314. 나무는 숲에, 돌은 채석장에 숨겨라. 어느 나라 격언인지는 몰라도 존중할 가치가 있었다. 우리는 봉고를 유원지 야외주차장에 넣었다.
328.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떨림이었다. 목과 가슴 사이에서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
332. “온전치 못한 자식을 세상에 홀로 남겨두고 가야 한다며, 그럴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333. 나는 나를 위한 변론을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승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볼펜 한 다스가 사라졌다. 노트는 열 권으로 불어났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자유로웠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인생의 표면을 떠돌던 유령에게 ‘나’라는 형상이 부연되 것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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